◇ 날적이

엄마손은 여전히 약손

아맹꼬 2021. 2. 2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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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중반이 넘어가고 누가봐도 어머니 혹은 아줌마라고 불리는 이 나이에도 엄마손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주전쯤
급체를 한건지 장이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배가 아프고 토할 것 같아서 점심도 반정도 먹고
그거 먹고도 다리가 꼬여서 도저히 앉아있질 못하겠어서
회사 휴게실에서 계속 누워있다 퇴근한 날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안방에 누워서
거실에 티비보고 있는 엄마한테 배 좀 쓸어달래려고
머리속으로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정작 입 밖으론 그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칠십대 중반의 노모한테 그런 말을 해도 되나
엄마가 요즘 나를 딸로 보기보단 애들 엄마로 대하는 것 같은데 이런 말하면 들어줄까
뭐 이런 생각들이 생각을 소리로 변화시키는 걸 막고 있었다.

그러다 집에 가려고 옷을 입으면서 랑군(엄마에겐 사위)에게 쟤는 왜 저러냐고 묻더라. 랑군이 배아프다고 하길래 이때다 싶어
엄마, 배 쓸어줘!
말해버렸다.

처음엔 애들한테 엄마 배아프다니 배 쓸어줘라고 미루는 걸 몇번이고 이야기해서 결국 엄마가 배를 쓸어주게 만들었다.

배를 쓸어주면서 요즘 엄마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하는데 엄마 손이 간만에 배를 풀어주니 나도 맞장구쳐주며 잘 들었다.
그러다 몇 살이 되어도 엄마 손이 약손이네 라고 하니 엄마가 눈으로 웃으며 찰싹 때린다.
자식도 엄마도 서로의 필요성을 느낄 때 좋은걸까.



아빠가 살아계실 땐 엄마는 아빠에 대한 불평이 생길때마다 나에게 풀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중이건 뭐건 배려가 없을 때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쌓여서 나는 딸인데 엄마면서 왜 딸을 생각치 않나 서운했던 적이 있었고 배 쓸어달라는 말조차 쉽게 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래. 위에 쓴 이유보다 이런 것들이 큰 작용점인 듯 하다.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뭔가 고용자와 피고용자 느낌의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것도 무시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가끔은 매일매일보단 가끔 보는 사이가 좋은걸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어느 정도 풀린 기분이다.
엄마가 웃으며 찰싹했다는 것도 나름 좋았단 뉘앙스로 받아들였다.
언제 또, 무슨 일로 싸울지 모르겠지만. ㅋ

난 아들만 있어서 엄마와 딸의 관계를 딸로서만 알 수 있을 뿐이라 엄마로서의 입장은 그저 미지의 세계다.
그렇다고 그걸 알기 위해 딸을 낳거나 입양을 해야지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단 소리다.





엄마가 배 쓸어주고, 그래도 병원에 가지않을 정도가 되었다. 애들과 랑군이 그 후로 내 배를 쓸어주었지만 엄마손보단 효과가 덜하다.
역시 엄마손이 약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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