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小小독서

라면을 끓이며, 김훈

아맹꼬 2016. 6. 21.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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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훈 작가의 글 중 제일 처음 접한 것은 흑산이다.

옛말로 천주쟁이의 일을 엮은 소설인데
문체는 건조하여 눈에 보이는 대로 적은 듯 한데 너무나 사실과 같이 다가와 반절 보다 말았다.
조선 말 무렵 시대의 극형이라던가 노비의 생활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다
다시 만난 김훈작가의 글
이번엔 산문집이다.

읽는 중이지만
글 하나하나 읽으면서
어찌 이리 글을 잘 쓸까 싶더라.
아껴본다라는 말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그 말이 와닿았다.

작가의 글만 보면 독신이려니 싶던데
오늘 찾아보니 딸도 있다.
김훈작가의 아버지도 소설가였다.
그건 이 책에도 언급되어 있군.
딸도 그저 평범하였다면 포털에서 검색되지 않았을건데 이든픽쳐스 대표라 나온다.
김훈작가가 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다른건 몰라도 김광주작가는 살가운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들에게 작가로서의 존경심은 주었던 것 같다.

이런걸 보면
난 과연 아들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게 되는군.

끝까지 읽고나서 좀 더 기록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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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일
몇장 남지 않은... 거의 완독 상태에 진입함.

역시 사람말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책도 끝까지 볼 일이네.

책 중간중간에
아버지 이야기와
(아주 잠깐이지만) 와이프 이야기에 
딸과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매를 둔 아버지였다.

인라인까지 도전할 정도고.. 
(몇살에 그리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스케이트 보드도 시도했던 모양.


뭔가 삶을 훔쳐본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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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p166
나는 수감중인 대기업 총수에 대한 가석방 결정이 법무장관의 '고유권한'이라는 언설에 반대한다. 장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유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사금이 아니고 마립간이 아닐진대, 어찌 직무에 따른 권한이 그 직위에 '고유'하게 귀솔될 수가 있겠는가. 장관은 다만 그 가석방이 법치주의의 원칙과 절차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공적으로 판단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을 풀어주면 이 나라가 얼마큼 더 잘 먹고 잘살게 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장관의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무법천지의 관례도 장관이 참조할 전례가 되지 못한다. 저 사람을 지금 풀어주면 이 나라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무너져내리며, 후세의 더 큰 무너짐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앞날이 닥쳐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장관의 일이기를 나는 바란다.


p242 
'잘빠졌다'는 말의 주어는 여자가 아니라 사물이고, 개체가 아니라 익명이며 규격이다. 이 익명성의 규격에 따라 여자들이 사물화될 때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점점 더 도발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 남자가 남성성만으로 온전할 수 없듯이 여자들도 여성성만으로 온전할 수는 없다. .. 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게 마련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그것을 긍정해주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잘빠졌다'는 말은 공업적인 말이고 더러운 말이다. 그 더러움은 사물성에서 온다. '잘빠졌다'는 말 속에 잘빠진 여자는 소외된 여자다. 인간과 언어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바뀔 때 더러움이 발생한다. .. 자유로 가득 채우는 여자가 아름답다. 그런 여자가 살아 있는 여자고, 삶을 영위하는 여자다. 



p257  
그림이 삶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삶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니 세월과 더불어, 세월의 풍화작용 속을 통과하며 살아가는 여자들의 젖가슴이 어찌 저 베레모 쓴 화백들의 절묘한 손놀림이 빚어내는 그림 속의 젖가슴과 같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 삶은 그림보다 무겁고 그림보다 절박하고 그림보다 힘들다.


p259
맥줏집에 모여서 저희 학교 여자교수를 흉볼 때도 '그 아줌마 .... '라고 말한다. 대기업은 아줌마를 무서워한다. 아줌마가 아니라 소비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류 백화점이나 고급 양품점에서는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르면 아줌마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백화점 관리하는 높은 아저씨들은 잘 알고 있다. 아줌마는 경멸의 대상인 것이다.
이 사회의 인구구성 안에 아줌마라고 불려야 마땅한 인류학적 여성집단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줌마라는 유형화된 질감과 '티'는 완연하게 존재한다. 아줌마는 성적 긴장의 날이 서 있지 않다. 아줌마는 풀어져 있고 아줌마는 퍼져있다. .... 
그러니, 그래서, 아줌마들이 어떻다는 말인가. 아줌마의 유형화된 질감과 행태는 그것 때문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야 할 죄업이 아니다. 오히려 아줌마는 세월과 더불어 늙어가면서 여성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사내들의 성적 시선의 사슬을 끊어버린 자유인의 이름일 수도 있다. .. 성적 수치심의 마모는 사회적 수치심의 상실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남자들은 생각하게 마련이다. 아마도 이것이 아줌마에 대한 집단적 펌하가 이루어지는 근거가 아닌가 싶다.


현재 핸드폰에 캡쳐되어 있는 페이지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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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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