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小小독서

4.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아맹꼬 2022. 2. 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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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하고나서 생각을 적으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4장까지 읽고 1차 정리?를 하려고 한다.

가끔 책을 읽는 동안 머리속에 그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할 때가 있다. 가령 미움받을 용기를 읽을 땐 젊은이가 하도 소리를 쳐대는 바람에 귀가 아픈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 책에선 확신에 차있지만 어떤 답을 얻고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정의내린 것이 진짜 맞아? 넌 어떻게 생각해?
목소리에 리듬이 있고, 가끔 그 목소리때문에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차분하면서도 냉소적이다.

..

둘째를 임신 중 기형아 검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다. 0과 1이 아닌 뱃 속의 아이가 기형아일 확률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당시 난 어떤 아이든 낳을거란 생각에 양수검사를 하지 않겠다 했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정말 그런것 맞아? 의문이 들었다. 그냥 비장애아가 태어날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어서 그런거 아냐? 나와 랑군, 그리고 각자의 조상들 중 장애를 가진 사람이 없었기에 들었던 일종의 자신감으로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막상 아이가 태어났는데 의사의 경고대로 장애를 가진 아이였다면?
그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을 순서도로 그린다면

양수 검사를 한다.
》비장애아라면 그대로 안심하고 임신상태를 유지하고 낳는다.
》장애아라면
》 여러가지 고민을 하며 임신상태를 유지하고 낳는다.
》 임신상태를 종료한다.

결국 결과는 낳느냐 낙태를 하느냐 두 가지 뿐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내게 남겨질 정신적, 신체적 데미지는 피할 수 없다. 휴우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아이는 비장애인으로 태어나 매일같이 내 잔소리를 듣는 불행?을 겪고 있지만 저자의 말대로 태어난 것이 가장 큰 행운인 것을 알려나.

아. 이번에도 죄다 내 이야기다.

저자가 훌륭한 직업을 가져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딱 서있는 기준을 가진 것으로 보여서 부모 입장으로 부럽다.

아직 5장부터 9장까지 더 들어야 한다.
다 보고나서 다시 한번 정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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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첫날 드디어 완독
4장인가까지 읽고 리뷰를 적었었는데,
그정도의 내용만으론 내가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일부분만 보고 되는대로 지껄인 것인지 그런건지 알 수가 없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다 보고나니 그나마 지난 번 리뷰가 막 지껄인게 아니라서 다행이구나.

김원영 작가(혹은 변호사)가 성장하면서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정의내리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 이 책에서 보였다. 나에 대해 명확하게는 아니더라도 정리되면서 남에 대해서도 들여다보게 된 게 아닐까?
직업도 한몫 했겠지만 성격자체가 주변을 예민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인것 같다.

그냥 그러려니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런 편이다. 그러다 이런저런 책을 보면서 하나둘씩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난 실천을 잘 하지 못한다. 말로만 떠드는...부끄러운 상태다.

내 주변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쉽게 생각한다.
장애인도 성소수자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차별을 경험하는지 보지 못해서 난 몰랐어. 라고.

아! 한번 있었구나.
국민학생 시절 반에 다운증후군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 엄마는 학기초에 딸과 잘 지내달라고 했던 것 같다. 반 애들도 그애를 나름 챙겼고 놀리는 아이도 없었던 듯 싶다. 아마도.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런 일로 인해 장애인들도 보호를 받으며 잘 사는 그런 따뜻한 곳이란 개념이 잡혔나보다. 내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녀가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중학교를 갔는지조차 모른다.

어른이 되고 출퇴근을 하며 지하철에서 가끔씩 장애인을 마주칠때가 있다. 신길역 지하도안에서 라인을 거의 덮을 지경까지 가판이 튀어나와 화를 내는 맹인도 보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장애인도 봤다. 대각선 엘리베이터가 생기기 전까진 매번 역무원을 호출해서 그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도 봤다. 불편하겠구나가 내 감상의 전부. 엘리베이터가 생겼을땐 드디어 생겼네. 재밌겠다 정도. 아이를 키우던 중이었으니 유아차를 끌고다니는 사람도 편하겠네 란 감상도 했던것 같다.
그렇게 변모되기까지 많은 장애인들이 노력했겠지. 광화문에서도 자주 봤다. 매일 투쟁을 하는 그 모습. 그러나 난 매일 그냥 스쳐지나갔다. 죽은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텍스트로만 느끼며, 가끔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들을 도와준 걸로 내 할일 다한것처럼.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가는것이 예의인가..경호원처럼 밀착보호하는 건 아니더라도 장애인을 만나면 도와줄 일이 있을지 모르니 관심을 갖고 있어야하는 것이 예의인가, 정신 발달장애인을 만나면 저 큰 손으로 날 때리는 상황이 벌어지면 안되는데 란 걱정도 할 때가 있었다. 신체적으론 내가 상대적인 약자여서 그런거라며 자기변명도 속으로 하면서.
접촉할 일이 많다면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을텐데 일체의 접촉이 없으니 책을 통해 조금씩 알 수 밖에 없다. 근데 그건 내가 이해한대로 곡해될 수도 있다.

글을 이만큼 쓰고보니 우리 아버지도 장애등급 판정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울 아빠는 목발을 짚고 다니고 월남전에서 포병으로 있어서 난청이 있는.. 중증장애가 아니어서 내가 그냥 장애인과 살고 있었단 걸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한 것이었구나. 그렇구나. 난 아빠를 아빠로 보고 기억하고 있었구나. 절뚝이면서 다니거나 목발을 몇십년 짚고 다녔어도 아빠는 그냥 아빠였다. 다리가 아파서 계단을 싫어했지만 다닐 수 있었고 심지어 나보다 더 빨리 걸을 수 있었기에 인식하지 못한 건 아닐거다. 만약 휠체어란 옵션이 붙어있었다면... 아마 그때도 그냥 아빠로 기억되었을지도. 그땐 도로 상태나 엘리베이터유무를 좀 더 따졌을테지.

그렇구나. 어쩌면 내가 아빠를 그냥 아빠라고 기억했듯이 그렇게 다른 장애인을 그냥 스쳐지나가는 행인을 인식하든 느끼면 되는 것일지도. 아빠의 아픈 다리를 생각하면 에스컬레이터를 찾거나 없으면 부축하는 딸이 되듯 그렇게 마음써주고 실천하면 되는 것일지도. 근데 그냥 그걸로 진짜 되는거 맞나?
누구나 흐름의 끊김없이 생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겨우 그정도로 되는걸까?
내 직업군 내에서 이런 마음으로 일처리를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죽음이나 사고가 있지 않더라도.

여전히 내 이야기를 적었구나.
하지만 아빠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게되어 나에겐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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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빠는 어떤 존재였는지 아직도 정리가 안된다.
엄마가 내게 만들어놓은 아빠의 이미지는 엄마의 남편으로서의 것이 아직까지 크다.
내가 직접 보지 않은 아빠의 모습까지도 기억처럼 내 머리속에 담겨있다. 그런 기억들을 다 제거하고나면 어떤게 남을까? 내가 기억하는 내 아빠 자체가 될까?
여전히 다정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식에게 완전히 무관심하지도 않았던.


내 아이들에게 난 어떤 아빠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을까? 그냥 애들이 기억하는 아빠만 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아빠에 대한 이미지를 세뇌시켜서 만들어진 아빠도 끼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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